학문의 본질(헤르만 바빙크)

보편적, 필연적, 영원한 것에 대한 지식이 학문의 본질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어떻게 논의되는지

학문은 단순히 현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사물의 원인과 본질, 목적과 목표를 통찰하여 ‘무엇이 그러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왜 그러한가’까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학문의 본질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영원한 것, 즉 논리적인 것에 대한 지식과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 학문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이 있어 왔는데, 바로 **합리론(Rationalism)**과 **경험론(Empiricism)**입니다.

  • 합리론의 관점:

    • 합리론은 감각적 인식이 지식을 제공할 수 없다고 보는데, 이는 감각이 변하는 현상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 오직 사고 작용만이 지식을 제공하며, 학문적 지식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고 여깁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사고 작용에서 발견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으며, 스피노자에게는 사고의 필연성, 논리적 연관, 근거와 결과의 수학적 질서가 진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 이러한 관념론적 합리론은 지식뿐만 아니라 존재(사물 자체) 역시 오로지 사고 작용에서 산출된다고 주장하며, 사고 작용과 존재가 동일하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모든 것이 꿈과 같고 실제가 없다는 절대적 환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 경험론의 관점:

    • 경험론은 감각적 인식만이 우리의 지식의 근원이라는 원칙을 고수합니다. 인간은 지식 추구에 있어 오로지 인식 능력만을 수반할 뿐이며,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이 관점에서 타고난 개념(본유 관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초감각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학문은 엄밀한 학문에 한정되고, 우리의 지식은 ‘무엇이 그러하다’는 사실과 ‘어떻게’에 제한되며, 사물들의 원인과 목적, 기원과 운명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 그러나 경험론은 논리학, 수학 등에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심각한 반대에 직면합니다. 모든 학문은 증명될 수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명제들로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경험론은 이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경험론은 정신을 감각적 세계에 맞춰 축소시키고, 정신 자체를 물질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다 **유물론(Materialism)**으로 귀결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학문의 본질로서 ‘실재론’의 필요성: 바빙크는 순수한 합리론이나 순수한 경험론으로는 지식의 객관성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일상적 경험,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확신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신학자들, 그리고 개혁파 신학자들의 입장을 이어받아 **실재론(Realism)**적 관점을 옹호합니다.

  • 실재론의 접근:
    • 실재론은 감각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지성이 감각을 통해 들어온 자료들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분리하고, 이를 자신의 소유로 삼는다고 봅니다. 즉, 인간 정신은 감각적 세계를 떠나서 스스로 지식을 산출할 수는 없지만, 감각적 인식을 통해 들어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활동하면서 고유한 특성을 따라 보편적 개념과 원리들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접근은 표상과 사물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표상이 외부 세계의 실재를 관념적으로 재현한다는 본질적인 연관성을 주장합니다. 학문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 필수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므로, 오직 지성을 통해서만 산출될 수 있습니다. 감각적 인식은 사물의 외적인 것을 고려하지만, 사물의 내부까지 관통하고 본질을 통찰하는 것은 지성의 독특한 능력입니다.

로고스(Logos)와 학문의 원리: 궁극적으로 바빙크는 학문이 보편적, 필연적, 영원한 것을 다룰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 특히 로고스(성자)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 모든 학문이 산출되는 원리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적 기초 원리이시며, 만물은 생각들에 기초하여 말씀(로고스)을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 로고스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존재하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유기적 관계를 논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마치 태양이 빛을 비추어야 육안으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빛(지성의 태양)**이 비추어야 어떠한 진리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단순히 빛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도 창조하셨듯이, 외적인 실재(창조 세계)와 내적인 인식 기관(인간 정신)이 상응하여 학문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학문은 단지 변하는 현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일반적이고 논리적인 것에 대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학문은 보편적, 필연적, 영원한 지식을 추구하며, 이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넘어선 실재론적 관점을 통해 가능하다고 설명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의 궁극적인 근거와 가능성은 만물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로고스에 있습니다. 학문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고유한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대상을 알 수 있고 그 대상에 완전히 연관되어야 합니다.

감각과 지성의 유기적 관계는 관념론과 유명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재론적 해결책의 핵심 요소

헤르만 바빙크의 저술에 따르면, 감각과 지성의 유기적 관계는 관념론과 유명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재론적 해결책의 핵심 요소입니다.

1. 실재론적 해결책의 맥락

바빙크는 학문적 지식 추구에서 오랫동안 대립해 온 두 가지 주요 경향, 즉 합리론과 경험론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 합리론은 지식을 인간 정신 내부의 사고 작용에서 도출하며, 감각적 인식을 변하는 현상만을 다루므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는 결국 주체에만 주목하여 관념론으로 귀결되며,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부정하거나 의심하게 만듭니다.
  • 경험론은 모든 지식이 오직 감각적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인간 정신을 수동적인 “쓰여지지 않은 판"으로 여깁니다. 이는 결국 물질에만 집중하여 유물론으로 이어지며, 초감각적이고 초자연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은 모두 학문의 완전한 가능성을 제약하고, 실재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하게 합니다. 실재론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객관적 존재와 보편적 진리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대안으로 제시됩니다.

2. 감각과 지성의 유기적 관계

바빙크는 실재론의 관점에서 감각과 지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유기적으로 설명합니다.

  • 지식의 출발점으로서의 감각: 모든 지식은 감각적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의 정신은 본래 육체에 매여 우주에 속해 있으므로, 지성은 오직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감각을 바탕으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 능동적인 지성: 그러나 인간 정신은 단순히 외부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빈 서판(tabula rasa)“이나 거울이 아닙니다. 지성은 가장 단순한 인식에 있어서도 이미 능동적으로 활동하며, 외부 세계의 자극을 해석하고 인상들을 조합합니다.
  • 보편자의 추상: 지성의 독특한 능력은 감각적 인식들로부터 **보편적인 것을 분리(추상 능력)**하는 데 있습니다. 감각이 사물들의 우연적이고 외적인 면을 다루는 반면, 지성은 사물의 본질과 내부를 꿰뚫어 보편적 개념들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지성적 개념들은 단순히 이름(유명론)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적 속성의 총합으로서 사실을 대변합니다.
  • 실재에 대한 신뢰할 만한 재현: 감각을 통해 얻은 인식이 객관적 실재에 상응하며, 지성을 통해 형성된 표상(표상)이 외부 세계에 대한 신뢰할 만한 관념적 재현이라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표상과 사물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집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실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실재에 다가간다고 바빙크는 주장합니다.

3. 로고스에 기반한 유기적 실재론

이러한 감각과 지성의 유기적 관계, 그리고 이를 통한 실재 지식의 가능성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에 뿌리를 둡니다.

  • 로고스(Logos)의 역할: 바빙크는 만물이 로고스(말씀)로 말미암아 지어졌으며, 로고스가 없이는 지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유기적 관계가 가능하게 되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외부 세계와 인간 정신을 창조했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조화와 상응이 존재하며, 인간이 실재를 인식하고 보편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 이성의 빛: 또한, 하나님은 인간 정신에 “이성의 빛"을 비추셔서(조명), 인간이 사물을 일차적으로 인식할 때 근본 개념들과 원리들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 지식의 세 가지 원리: 바빙크는 이러한 유기적인 지식 체계를 신학의 세 가지 기초 원리로 설명합니다.
    • 본질적 기초 원리: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자기 지식).
    • 외적 인식의 기초 원리: 피조 세계(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 내적 인식의 기초 원리: 인간의 지성/이성, 즉 인간 정신에 비춰진 하나님의 빛.

이 세 가지 원리는 각각 구별되지만, 하나님을 저자로 삼고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지식을 내용으로 하기에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가집니다. 이처럼 감각과 지성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바빙크는 지식이 단순히 현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본질에 대한 것임을 강조하며, 이는 신학이 궁극적으로 학문의 여왕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이는 로마 가톨릭의 이원론이나 루터교의 단절적 이해를 비판하며, 자연과 은혜의 조화를 강조하는 개혁 신학의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냅니다.